"아무리 급해도 우리 엄마 앞에서 고생 자랑은 아니지 않아?"
포스터에 나열된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만 해도 지구 한바퀴 반, 아니 세바퀴는 거뜬히 돌것만 같다. 어릴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두가지, 늦은밤 술에 취해 항상 중얼 대던 엄마의 '니 엄마 목숨 참 질기지.' 그리고 열네살이 되어서야 만난 아빠의 '너는 아빠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쏙 뺄거다' 였다.
이해할수도, 이해하고싶지도 않았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나에게 어려운 질문들만 던져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있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아버지는 평소 같지 않게 잠꼬대를 하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같은날 밤, 나 역시 돌아가신 아빠의 친구분을 꿈속에서 만났다.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같은 맥락을 가지고있다. 웃는날보다 가슴치는날이 더 많았고, 속 시원히 소리를 질렀던 날 보다 쓰디쓴 소주 한잔과 함께 삼켜야했던 먹먹한날이 더 많았다는것.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꼭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처럼.
평생을 남편에게 몽둥이로 맞으며 살아야 했던 오쌍분여사의 곁엔 이제 단어 하나 제대로 내뱉지못하는 늙은 남편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의 오해를 풀지도 못한채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영원의 속사정은 갑상선 암과 이후 차례로 발생하는 난소암이었다. 30년이란 시간동안 곪았던 친구 난희의 가슴은 영원의 '진실'을 마주했을때 사라진다.
"이번엔 엄마 친구들 이야기 어때? 제목은 엄마의 늙은 친구들!
집집마다 아주 구구절절이다 "
"막장도 그런 개막장이 없지"
어릴땐 그렇게 듣기 싫었던 꼰대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왜 그들은 말하지못했을까. 억울하진않았을까, 그리고 왜 그런선택을 하며 살수밖에 없었을까. 젊은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농도가 짙은 아픔이 벤 우리 엄마 아빠의 이야기는 왜 이토록 사무치는걸까.
평균나이 70세를 웃도는 그들은 무서울게 없다. 하지만 당장 오늘 내일 하는 엄마의 곁에서는 여전히 아이같고, 첫사랑이었던 남자앞에서는 여전히 소녀처럼 설레인다. 출가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혼자 살 수 있다고 매일 다짐하는 희자가 그러하듯 우리는 죽을때까지 홀로서기를 연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또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찾아간다.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의 껍질을 공유하며 사는 이유도 바로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석균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모든 남자들이 그랬듯,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
세계일주를 약속했던 남편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고 아내를 무시한다. 딸의 울음을 뒤로한채 일에 몰두하고, 매맞는 딸의 사정을 모른채 교수사위를 챙겨왔다. 중졸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고졸출신인 아내마저 미웠지만, 사랑은 하고있다. 어쩌면 그렇게도 치열하게 살아가야했기에 그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다정한 소리 하나 하지못하는 남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으로서 그가 책임져야했던건 당장 먹여살려야했던 세딸들과 사랑하는 아내였다.
아직 세상의 겹을 잘 모르는 어린 나는, 이따금씩 누군가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때가 있다.
"그럴거면 왜살아요? 그렇게 사는게 바보같은거지"
하지만 살다보면 각각의 선택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것을 그때는 알지못했다. 나 역시 모든걸 이야기하지않은 채 살아가면서 말이다. 이미 오랜세월 층층이 쌓아온 꼰대들의 이야기와, 현재를 쌓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분명히 어딘가 닮아있다. 자식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우리네 삶.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고 절절하다. 6화를 보는데, 옆에 누워 코를 고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도 그럴 수 밖에 없던것이었을까. 미안하다는말을 배우지못해서였을까. 드라마를 다 볼때쯤이면 나는 조금은 내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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