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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는미술관 -박현정 미술 산문집

by 김봉봉 2015. 11. 2.








p.73


엄마와 할머니는 다음날 나를 조용히 불러다 앉혀놓고 병아리가 원래 약했다며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병아리가 죽게되면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서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진이 다 빠진 병아리를 마치 인간 아기를 돌보듯 밤에도 추운 부엌으로 나가 물을 데워먹였다.

부처는 '와서 믿으라' 라고 말하지않고 '와서 보라' 라고 했다던데, 불교신자였던 할머니 덕분에

나는 자비가 색과 형태를 지닌것임을 그때 봤다. 추운 겨울밤 두 시간마다 병아리에게 물을 먹이던

할머니의 둥근 분홍색 솜바지처럼. 그날 이후 '목숨을 건 남녀의 사랑', '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 에

매료된 적도 있었지만, 그 어떤 사랑보다도 '자비'가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았다.



p.110


윤석남은 "예술가는 지상으로부터 20센티미터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 너무 높이 떠 있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라고 말한다.


p.117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인가 엄마는 명지대학교에서 일하던 자리가 20년넘게 꿈에 나오더니

최근에야 보이지 않는다며 웃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고목의 생명력에 감탄하듯 말했다.

한동안 집안 구석구석이 등나무 공예품으로 가득찼던것도 어쩌면 나중에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는것도 알게되었다.


p.151


그렇다면 이상향이란 결국 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운 곳이라는 뜻일까.

16세기 조선의 학자 조식은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며 호기롭게 이곳을 낙원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렇다면 나도 몇 번 정도는 이곳이 무릉인적이 있었다.







야나기미와 [My Grandmothers . 2001]


출처 : http://www.yanagimiwa.net/grandmothers/project/02.html







 


p.206

그래서인지 그녀들은 카메라라는 대표적인 타인의 시선 앞에 노출되어 있는데도 자신 속에 침잠해 들어가 있는 듯 하다.
엘리베이터걸이 더 이상 타인과 닿지않는, 어떤곳에 가라앉아 있었듯이.
[마이그랜드마더스]에서 연기하는 그녀들은 누구보다 자신이 현재 할머니가 아니며,
이 상황이 가짜라는것을 알지만 진짜와 만나버린듯 하다.








강덕경, 빼앗긴순정 .1995>

'온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으면 좋겠어'



p.218

그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우리들도 소모품, 자유를 빼앗긴 새장속의 새들끼리의 , 동병상련과 같은 마음이었다.


p.230

"집단이 시켜서 한 행위라고 변명하는 한 결국은 자신의 인생도 없었던 것이 된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죽게되는것" 이라고 중국에서의 학살행위를 인정하고
평생 사죄한 어떤 일본 군인의 말처럼. 집단속에서 지워진 이름과, 신문 사진속에
잘려버린 자신의 얼굴을 찾아 들고서.





짧은분량이지만 그녀의 글은 가장 쉽게 미술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있었다.
그녀가 이전에 만들어진 누군가의 작품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때
미술이라고 하는것이 그렇게 어려운것은 아니라는것,
결국 모든건 '보는것' 에서 시작한다는 이 간단한 답을 책은 몇몇의 아티스트들과
저자 박현정의 일상을 빌려 설명해준다.
그렇기때문에 저자는 미술관에는 혼자가야한다고 말한다.
전시된 그림의 전체를 이해하지않아도 좋고 ,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으니.
그녀 역시 자신의 어린시절과 일상의 편린속에서 미술을 이해하고있기에 그런거겠지.

너무 좋다. 나는 이 책이.
그래서 마지막장을 덮고 한참을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야나기 미와의 작품을 보았을때 그러했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위안부할머니들의
작품과 이야기에서 그러했다.

그리고 강덕경의 '빼앗긴순정' 이 내가 중학교 1학년었을 시절
처음으로 박물관이라는곳에 가서 보았던 첫번째 그림이라는걸 깨달았을때,
굉장한 잘못이라도 한듯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뜨겁게 올라왔을때 더, 그러했다.
  
위안부라는게 뭔지도 모른채 예쁜 벚꽃에 눈이 가있던 
14살의 나는 한참후에서야 얼굴을 가리고 나무밑에 누워있는 나체의 여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뭐해?" 라고 묻던 아직은 어색했던  같은반 친구에게
"이거봐" 하며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가리켰던 짤막한 해설.
모든걸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엄청나게 끔찍한 일이라는것을
우리 둘은 그림 아래 적혀있던 해설을 읽으며 알게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뒤에 한참이나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역사라는것의 무게감을 체감하게 되었고,
바로 서둘러 도망치듯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이 그림을 책을통해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되었다.

역사여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박현정이 소개한 아티스트의 작품들은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가슴속의 무언가를 치고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이 짧은 분량의 책을 읽는 이틀동안 책을 가방에 넣지않고 가슴에 꼭 품은채 들고다녔는데,
그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활자의 무게가 실제 책의 무게보다 무거워서였기 때문이었다.
놓치면 그 많은 글자들이 와르르 쏟아져 사라질것만 같았다. 그만큼 책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챕터마다 밀도가 높았다.

그녀가 소개하는 아티스트들은 모두 자기 이야기를 강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고른 책이긴하지만  단순한 미술이론서의 내용이 아니라
미술을 전공하고 공부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진짜 미술의 '매력'을 알려주어서
이 책이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소개하는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녀의 문장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가 추천했던 미술관을 다녀와야겠다.
혼자서.